[2025 공익활동가주간]"나는 끊임없이 상처받지만 나는 갑각류가 되지는 않을 거야" - 언니들의 병원놀이 박슬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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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끊임없이 상처받지만 나는 갑각류가 되지는 않을 거야"

- 언니들의 병원놀이 박슬기 활동가


박슬기님을 처음 만난 건 작년 9월이었다. 나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며 논문 주제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그녀를 만난 ‘몸과 섹슈얼리티’ 수업은 앞으로의 연구 주제는 아니지만 학생으로서 사회학 공부를 하는 마지막 과정이었다. 첫 수업에서 늘 그랬듯 각자 소개를 하는데 이 사람을 인터뷰 해야겠다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사실 작년부터 기획된 것이다. 인터뷰어 신청서에도 썼듯이 박슬기님을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녀의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그녀의 활동 방법이, 그녀의 위치성이, 또한 그녀의 활동 이슈가 경계를 넘나들며 “요즘 활동가”들의 모습을 많은 부분 대변해주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자기 현장에서 활동해 온 활동가이지만 또 오랫동안 “활동가는 아니지만...”이라고 자신을 정체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이제 “활동가 박슬기”라고 소개하게 된 과정에 대해 3시간의 인터뷰 시간 동안 쉼 없이 듣고 기록했다. 

*박슬기님은 그야말로 말의 은사(기독교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가 넘치는 분이다. 질문지를 미리 보내드리긴 했지만 3시간 동안 새로운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인터뷰가 술술 진행됐다.



제 1막_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또라이


‘마음’을 들여다보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소수자성에 대한 그런 예민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기질이나 성향 일수도 있고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저도 계속 돌아보게 되는 거죠. 내 활동에 대한 진정성 같은 고민이예요. 사실 우리가 연대하는 사람들이 어쨌건 나는 아니잖아요. 이주민, 장애인, 청소년, 성매매여성, 공장노동자... 내 문제는 아닌데 나를 이렇게까지 움직이는가에 대해 ‘동정인가?’ 이 마음이 뭔지에 대해 계속 들여다봤던 것 같아요”


‘다름’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고...

“누구나 사람들은 다 고유한 존재인데 ‘너의 다름을 드러내면 안 돼’라는 교육을 받았고 내가 내 다름을 드러내면 위험하고 사회에서 고립될 것이라는 그런 위협이 있었죠. 저는 의문도 많고 비판도 많았던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세상이 너무 정당하지 않게 보이고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저를 굉장히 위험한 존재라고 염려했죠.”


길들여지지 않는 게 나의 긍지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 입시 면접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 모습들이 좀 이상하게 보였을거고 친한 친구들도 저를 ‘또라이’라고 불렀죠. 저 역시도 그랬고요. 근데 그게 저한테 긍지였어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는 거고 어떻게 보면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결국은 학생운동을 하게 되는...

“광주에서 컸어요. 5.18의 잔상이 남아있고 최루탄의 기억도 남아있고요. 광주는 저에게 복합적인 정서예요.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왔습니다!’라는 자랑스러움도 있었지만, 바른 소리한 사람들은 총 맞아 죽는다는 공포의 정서도 있었어요. 도로 점거하고 최루탄 쏘고 하는 소위 데모하는 운동 방식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어요. 

결국 운동이 사람을 설득하는 건데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이미 유효하지 않다라고 생각해서 대학에 가도 학생운동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근데 뭐 결국 학생운동을 하게됐죠. 누가 하자 해서 한 건 아니고 내가 진짜로 느끼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그랬어요. 제가 발언하면 감성 폭발해서 저도 울고 사람들도 울고... 그러다보니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특화된 뭐 그런. 그러다보니 운동권에서는 주목을 받게 된거죠.” 


생존권이 무너진 사람들

“제가 00학번인데 그때가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던 때니까 소위 생존권 무너지고 있는 사람들이 내 앞에 있잖아요. 거기에서 사실 제가 제 계급에 대한 거를 배우게 됐죠. 지금도 각인되어 있는 장면 중에 하나는 그 당시에 마마 밥솥 언니들이예요. 사장이 임금을 체불하고 곧장 폐업을 하고 튀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내가 일했으니까 돈 받으려고 노동청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언론도 관심없는 작은 규모였어요. 

그 사람들이 다 제 또래였죠. 소위 말하는 여공들이고 언니들이라고 부르면서 같이 연대를 한 우리는 여대생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사실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이런 사실이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내 눈앞에 그러니까 이 사람하고 나하고의 어떤 차이는 정말 100% 우연인 거예요. ‘우리가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어떤 구호처럼 그냥 100% 우연인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말밖에 없다는 무력감

“언니들이 새벽에 노동청 앞에 비닐 몇 장 깔고 누워 있는데 새벽에 경찰들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도 달려갔어요. 그 언니들 5~6명, 우리 5~6명 그게 다였는데 닭장차가 3대나 와서 우리를 에워싸는데 그 장면이 너무 북받치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말 밖에 없구나... ‘너는 밥도 하지 말고 빨래도 하지 말고 공부만 해라’라고 하는 집에서 비싼 등록금 빚낸 돈으로 받아서 여기에 와서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너무 견딜 수가 없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고, 그 안에서 내가 배우는 정치라고 하는 그 공부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어요.”


여기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학생운동이 퇴조하던 시기, 똘끼 다분한 활동가의 등장과 현실의 벽 앞에서의 좌절 스토리’ 이지만, 감히 그녀의 활동가 인생에 기수를 붙여본다면 이제 1막이 내리고 2막이 시작된다.


제 2막_고립의 시간: 기록되지 않고 총화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활동가로서의 삶


나의 무기를 가져야만 해

“자기 생존권 때문에 머리 깨져서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말 밖에 없다는 무력감들이 몰려왔어요. 저는 완전 태생적 문과인데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기술로 뭔가를 할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에 의사가 돼야겠다 했어요. 

이런 결정을 했을 때 시간이 지나고서는 많은 지지가 있었지만 제가 신뢰하고 좋아하고 존중하던 같이 운동하던 그 그룹들이 제 결정에 대해서 ‘배신이다’라며 상처를 많이 줬죠. 다니던 대학 그만 두고 재수해서 의대에 갔어요. 인턴 레지던트까지 하면 10년 넘게 고립된 생활을 했어요. 그 사회 안에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또 내부의 질서를 위협하는 그런 이질적인 존재였어요. 위협적인데 무력한, 역설적이죠. 저는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도 노력했죠.”


10년의 시간, 이 무기를 정말 잘 써야하는 책임감

“그때 내가 만약에 이 기회 비용을 봤을 때 그 10년을 정말 미친 듯이 활동했다면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든 영향을 끼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어쨌건 가지 않은 길이니까요.  진짜 진심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 무기를 갖고 있다고 믿거든요. 저한테는 그 무기를 가지기 위한 결심과 과정이었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이었고 그동안 운동을 못했기 때문에 이 무기를 정말 잘 써야 된다라는 생각도 있는 거구요. 그 시간을 버텼던 것도 저는 너무나 진짜 너무 힘들었고 너무 정말 매일 소멸되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버틴 것도 사실은 그런 책임이었어요.”


각자 자기의 현장이 있고 자기만의 무기가 있어

“누구나 어떤 무엇이 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 20살 때 생각했던 그런 미친 듯이 활동가는 아니어도 그런 활동가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그 이후에 각자의 고민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무기들을 찾아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같이 운동했던 어떤 사람중에 교사가 된 사람도 있는데 그 선생님이 그 교실에서 자기 현장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에 대한 신뢰도 있어요.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들이 약간 나이를 들면서 제가 저를 용서하게 되면서 갖는 과정인 것 같아요.” 


병원: 나의 노동현장이자 활동현장

“산부인과 의사로서도 그 엄청난 고립의 시간을 겪고 제가 버텨왔던 거는 정말 의사가 되면 내가 그렇게 염원했던 기술을 가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지만 사실 그 조직은 정말 늪이고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가장 응축적으로 담겨 있는 엑기스 같은 공간이예요. 그 안에 있는 실제 나의 노동이 고립의 연속이고 그 안에서 분투를 하는거죠. 

저 혼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진료하는 것에 대해 간호조무사부터 내 동료 의사, 나를 고용한 병원 원장 심지어는 환자들도 그냥 약 처방해주고 수술할지 말지 얘기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계속 얘기하는 건 내가 내 몸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내 몸을 어떻게 수용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상담을 하는 거지 그거를 약 먹어라 수술해라로 귀결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오는 걸 제가 이제 설득해서 계속 같이 이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제 원칙이기 때문에 저항감이고 나쁜 의미의 또라이 그리고 그게 결국은 무능함으로 귀결되게 되는 거죠. 

내가 이 노동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노동을 저의 활동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현장이 내 노동 현장이고 내 활동 현장이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이 노동 현장에서 제가 하는 말 한마디 진료 하나, 눈빛 하나 손짓 하나 이 공간 전부가 제 활동이예요.” 


의사와 활동가의 경계에서: 두려움과 경계심

“제가 계속해서 이렇게 깎여나갔던 시간들이 저에게도 두려움의 시간이죠. 머리로 생각하면 굳이 뭐가 두렵냐 누가 나를 헤코지하겠냐 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게 의대 1학년 시기부터 군대식으로 체화된 어떤 조직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에 정말 막연하게 언제나 나는 또라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찍혀 나갈 수 있다라는 이런 체화된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의사 박슬기로서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고 언제나 뭔가 활동명을 쓰거나 노래를 하고 음반 만들고 했던 것도 노래 부르는 사람의 어떤 정체성으로 계속 연대하고 활동하고 이렇게 하고자 했던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측면이 하나가 있었고 사실 또 하나의 측면은 지금도 계속 가지고 있는데 제 어떤 위치성에 대한 경계심인데 제가 의사라고 밝힘으로써 저에게 달라지는 시선과 제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이크를 더 가지게 되는 것을 저는 정말 경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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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고래”라는 이름의 음악인으로, 곳곳의 투쟁 현장에서 노래로 연대하던 때. 사진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에서 길을 막은 경찰 앞에 노래로 저항하는 모습. 


의술이라는 자기만의 무기를 갖고자 10년 넘는 고립의 시간을 견디고 나서도 의사 박슬기로 홀로 분투하며, 몰래 활동해오던 시기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기록되지도 총화되지도 않았지만 무언가를 계속 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의 활동 기록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음악인으로 활동한 ‘사탕고래’의 음원은 음원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대표곡은 ‘소년은 울지 않는다’이니 꼭 들어보시길.

 

제 3막_활동의 장을 만들어나가기(feat. 연체동물)


나에게 맞는 운동 방식을 찾아서

“노동 현장이면서 활동 현장인 병원도 있지만, 나에게 맞는 방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집회라고 하는 게 우리가 이번에 광장에 너무 많이 경험했지만 그것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정말 큰 힘이 있고 그런데 그걸 유일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불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집단으로 있을 때 누가 지금 불편하고 누가 배제돼 있고 누가 마이크를 가지고 있고 누구의 이야기가 이 안에서 가장 발언력이 센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예민하게 감각하는 부분이고 그게 제가 활동을 만들어온 어떤 질문들의 토대거든요.”


나의 신호를 그들이 듣고, 그들의 신호를 내가 듣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면서부터는 언제나 물리적으로 너무나 고립돼 있는 혼자라는 그런 시간들이었기 때문에 저는 정말 그냥 고군분투의 역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무엇을 붙잡고 왔는가가 제가 느꼈던 감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놓지 않고 이런 게 결국 저는 일종의 타전이라고 생각하는거예요. 

내가 특별한 게 아니고 어디에나 반드시 있다 누구는 반드시 있는데 그 사람이 혼자가 아니게 내가 신호를 주는 거죠. 내가 너무나 고립된 상황에서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게 자기 혼자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다 나처럼 고립돼서 숨어 있을 거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타전을 보내는 것이 결국 그 사람들을 끌어내는 것도 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거죠. 내가 고립되지 않기 위한 그런 건 거죠.”


언니들의 병원놀이*의 시작

“무능함으로 귀결되는 고립이 힘들었고 활동에 대해서도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게 내가 맞게 하고 있는 건가 가장 최선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이 사회에서 우리의 몸에 대한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의사라는 사람이 한 명은 나서야겠다 라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언니들의 병원놀이’는 제가 계속해서 이전에 다른 여성들하고 연대하면서 품어왔던 이름인데요, 내가 내 몸의 주체이고 주인이이니까 내 몸을 이야기하고 그걸 서로 놀이처럼 같이 연대할 수 있는 페미니즘 의학 수다라는 모토를 가지고 시작했죠. 의학은 의학인데 어떤 권위로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놀이처럼 얘기하는 수다 같은 장을 만드는 게 저의 지향이었고 그래서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알고 말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목표였어요.”

언니들의 병원놀이 의사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만난 사람들이 성매매 여성들이었고 그들을 언니들이라고 부르고 활동가에게도 서로 언니라고 불러요. ‘언니’라는 표현이 성별이분법적 표현이 아닌가 고민도 했지만 ‘말할 수 없는 몸들’에 대한 이름이기도 하거든요. 언니라고 하는 게 연결감이 있고 저에게는 분명한 지향이 있는거죠. 병원 놀이라고 한 건 병원을 놀이처럼한다는 의미예요. 어떤 지식 권력으로 내가 너에게 맞는 정보를 제공하겠다 하는 것도 경계하거든요.(인터뷰이 말 중에서)


의사라는 무기를 써야하는 순간

“이제 내가 의사라는 것을 무기로 이야기를 해야겠다라고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었어요. 소위 말하는 일회용품 생리대, 독성 생리대 파동 때였는데 산부인과 의사들의 커뮤니티가 있는데 그 안에서 환자 혐오가 장난 아닌 거예요. 몸 당사자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혐오할 수 있을까? 모두가 그 혐오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커뮤니티 안에서 그 혐오 발화가 있다는 거는 적어도 이 커뮤니티 안에서 그 혐오를 해도 안전하다고 본인이 믿는 거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머릿속에 펑! 하는 순간이 왔어요. 내가 두려워할 게 뭐냐 찍혀나가면 그만이지. 그냥 확 질러버려!”(기록자 주_순화해달라고 요청하셔서 순화했습니다) 


누구나 안전하게 내 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장

“토크 콘서트라는 형식으로 장을 제안하고 그때 우리가 처음 이제 기획한 게 ‘생리 콘서트’라는 걸 했어요. 내가 의사로서 이게 맞아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장을 열어야겠다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의사로 수련생활하고 살고 있던 전주라는 지역에서 계속해서 연대 활동을 해온 개인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설득했고 9명이 모였죠. 이 때 대부분의 논의가 면 생리대 아니면 생리컵 이런 대안으로 가는 거였는데 우리는 대안 말고 왜 이렇게 됐는지 구조를 드러내야 된다는 얘기를 했어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드러낸다라는 거를 명백하게 하고 그 안에서 어떤 전문가 주의로 전문가가 나와서 하는 강연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오픈할 수 있는 것이 중심이어야 된다라고 해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한 달 내내 같이 고민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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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세계여성의날 전북여성단체연합 주관의 성평등디딤돌상 수상 (언니들의병원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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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전주의 지원사업을 받아 진행한 연구 중 두 번째 작업. 첫 연구는 <전북 장애•이주•청소년 여성의 재생산권 연구>, 두 번째는 <전북 성소수자 경험 연구>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말할 수 없는 목소리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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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폭력 끝장집회>에서 언니들의병원놀이가 공연한 마당극 “춘향미투뎐”. 전주의 특색을 살려 춘향전을 각색하여,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념을 꼬집고 여성들의 지지와 연대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내용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상, 사진 출처: 본인 제공)


나는 갑각류가 아닌 연체동물

“‘나는 끊임없이 상처받지만 나는 갑각류가 되지는 않을 거야’ 제가 일기에 썼던 구절이예요. 그러니까 갑각류처럼 외부의 상처에 둔감하고 그런 감각을 다 튕겨내는 그런 강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거죠. 나는 계속 정말 바람만 스쳐도 상처받고 이런 사람이 돼야지만 누가 상처받는지 감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절대 안 죽을 거야. 그러니까 사라지지 않고 계속할 거야. 이런 결심이 정체성이었던 것 같고 그게 저의 근육이고 제가 지금 유일하게 저 자신에게 신뢰하는 힘이에요.”


활동가 박슬기에게 아직 3막은 진행중이다. 언니들의 병원놀이는 시즌1을 마무리하고 시즌2를 준비중이고 개인적으로는 제주도에서 노동과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 동안의 그녀의 활동을 짧은 인터뷰 글로 다 담기에는 기록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그녀가 경계인으로서 어떻게 자기만의 장을 만들며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풀어내었다. 그녀의 노동현장, 활동현장에 응원을 보내며 인터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인터뷰어 : 서미화
공익활동과 활동가들에게 관심이 많은 활동가 출신 연구자입니다. 시민사회, 공익활동 관련해 주로 강의나 연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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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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