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공익활동가주간]질문으로 시작된 저항, 공익활동가로 길을 내다 - 대전여민회 전)사무국장 이은주 활동가

ea0c666ab03c7.png


질문으로 시작된 저항, 공익활동가로 길을 내다

- 대전여민회 전)사무국장 이은주 활동가


대전광역시 중구 1332번길 2층 양옥집. 이곳에는 38년간 대전지역 여성운동의 중추 역할을 한 대전여민회가 있다. 대전여민회가 창립된 건 1987년. 6.10 항쟁으로 6.29 선언을 이끈 대전지역 여성 운동가들이 주축이 됐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가부장성을 체험한 이들은, 페미니즘 가치에 기반한 차별 없는 평등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성주의적 소통과 연대야말로 차별 없는 평등 사회를 세우는데 꼭 있어야 할 가치라고 보았다. 이러한 소망을 담아 대전여민회를 1987년 창립했다. 그리고 여민회란 이름에 포부를 담았다.

여와 민 그리고 회는 여성의 눈으로 세상보기, 민주적 참여운동, 함께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대전여민회는 지난 38년간 노동상담, 성폭력 상담, 사이버성폭력 감시단, 성평등 교육, 한부모 지원 사업 등 성평등 사회를 위해 애써왔다. 그 자리에는 대전여민회에서 가장 오랜 기간 일한 이은주(39) 활동가가 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딸, 질문을 품다


이 활동가는 1986년에 태어났다. 부모는 농촌에서 태어나 어렵사리 도시 대전으로 이주했고, 첫딸인 이 씨는 집안 어른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가난과 착취로 배움의 기회를 잃은 채 힘겹게 건설 현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작은 가게를 꾸리며 가족의 생계를 도맡았다. 

집안 분위기는 매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귀가해야 하고 친구 집에서 잠을 자는 일은 금기였다. “놀면 집안이 망한다”는 어른들의 신념 아래, 어린 딸은 억눌린 규율 속에서 자랐다. 친척들까지도 “첫째인 네가 잘해야 동생들도 잘할 텐데, 그것도 대학이라고 갔냐” “여자가 잘난척하기는... 너 잘난 거 하나도 없어” 같은 핀잔을 쏟아냈다. 

그런 말들은 어린 그녀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상처는 반대로 힘이 되기도 했다. 숨 막히는 가정환경에서 자랄수록 이 씨는 “오히려 내 주장을 더 하고, 내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졌다”고 회상한다. 집 안의 보수성과 억압에 대한 반발심은 그녀에게 밖으로 향하는 동력이 되었다. 

중학생 시절, 그녀는 처음으로 가정의 울타리 밖 세상에 호기심을 품고 날개를 펼쳤다. 교복 치마를 짧게 줄이고 머리를 염색해 보기도 했고, 방과 후에 친구들과 노래방이나 놀이터를 전전하며 늦도록 돌아다녔다. 물론 겉으로는 반항적이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집에 조금이라도 늦을 때면 아버지는 노발대발했고, 어머니는 딸을 걱정하며 애가 타들어 갔다. 

결국 이 활동가는 언제나 약속된 귀가 시각까지는 집으로 돌아왔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며 모범생과 말괄량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던 청소년기였다. 그 시절 이 씨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방황했다. 집 안에서는 고분고분한 맏딸이어야 했지만, 밖에 나가면 자유롭게 웃고 뛰놀고 싶었다. 보수적인 가족의 기대와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그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질문들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왜 딸인 나는 이래야만 하지?’ 라는 물음이 희미하게나마 싹트고 있었다.


청춘의 방황과 깨어남


억눌렸던 질문들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 서서히 밖으로 흘러나왔다. 대학에 온 이은주는 이전과 다른 자유를 맛보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녀는 “외모에 따라 여성의 등급과 서열이 매겨지는” 현실에서 인기 있는 여성이 되고 싶어 했다. 귀엽고 섹시한, 양립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모두 갖추어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굽 높은 구두에 치마 정장을 차려입고 화장을 하며 스스로를 꾸몄다. 하지만 내면의 그녀는 그런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주도적이고 약간 대장 같은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억지로 얌전하고 예쁜 역할을 연기하는 대학 시절은 어딘가 불편하고 이질적인 시간이었다. 

그 답답함을 해소해 줄 돌파구를 이 씨는 의외의 곳에서 찾았다. 학과 수업보다 교회 모임에서 더 큰 울림을 얻은 것이다.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 어릴 적부터 다녔던 교회는 여전히 경직된 분위기였지만, 대학 시절 만난 친구들은 달랐다. 서울대 철학과로 전과한 한 교회 친구는 그녀의 물음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정말 지옥이 있냐, 죽음 이후의 삶이 있냐”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구하던 그녀에게 친구는 책을 건네주며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답을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의심하고 탐구하도록 이끌어준 친구 덕분에, 이은주는 신앙을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기존 교회에서 느낀 답답함을 털고 그녀는 보다 열린 신앙 공동체를 찾아나섰다. 마침 2008년경, 사회 곳곳에서는 젊은이들의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광우병 촛불집회로 대변되는 민주주의 열기가 교회안에도 스며들던 때였다. 이은주는 복음의 본뜻이 단순한 개인 구원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예수의 길은 약자의 옆에 서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깨달음 아래, 그녀는 세상을 향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 무렵부터 그녀는 거리로 나섰다.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농성장, 재개발로 집을 잃은 철거민들의 천막촌 어디든 달려갔다. 교회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며 노래 부르는 연대의 현장에서, 그녀는 가슴 뛰는 희망을 만났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기 한 몸을 보태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겪어온 여성으로서의 억압에 대해서는 아직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집안의 성차별적 잣대에 갇혀 주말 밤 6시 이후를 꿈꾸지 못했던 사춘기 소녀.... 그 모든 경험을 관통하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83da6fc75b56a.jpg
공공연구노조내 성폭력 및 성폭력 2차 가해 해결 촉구 기자회견


페미니즘을 만나다: “이건 내 이야기였다”


이 활동가 인생에 두 번째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사회운동에 몸담은 지 몇 해가 지난 뒤였다. 20대 후반 무렵,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이 그녀에게 한 권의 책을 권했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었다. “한번 읽어봐”라며 건넨 그 책장을 넘기던 순간을, 이은주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했다. 

“읽으면서 ‘이거 내 얘기인데?’ 싶었어요.” 그녀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 그제야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듯, 자신이 느껴온 부당함과 답답함의 이유를 짚어낼 수 있었다.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로 선명해졌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강요받은 순종, 대학 시절 여성다움에 대한 이중 잣대,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했던 편견들까지 —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녀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성운동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집회에 참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있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사상을 깊이 접하고 나니, 그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의 풍경이 한층 분명해졌다. 억눌린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곧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2016년즈음, 마침내 이은주는 “그래, 나는 페미니스트다” 하고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눈치 보지 않고, 절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부당한 굴레를 걷어내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다짐이었다.


48f8859346766.jpg
대전여민회 성폭력 상담소 다힘 개소


공익활동가의 길을 선택하다


대학 졸업을 앞둔 이 씨는 한때 안정된 직업을 고민한 적이 있다. 부모님이 바라던 교사나 공무원의 길이었다. 실제로 교육대학원 진학과 교원 자격 취득을 염두에 두고 철학과를 선택했고, 졸업후 몇 년간은 공무원 시험 준비도 했다. 그러나 책상 앞에 붙들어 두는 공부는 체질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자신의 열정을 잃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마저 걱정하는 현실적인 삶과,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삶 사이에서 그녀는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과감히 후자를 택했다. “인생의 3분의 1은 일을 하면서 보내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삶의 귀한 시간을 의미 있는 일에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2014년, 이 씨는 자신의 첫 일터로 비영리 여성단체인 대전여민회의 문을 두드렸다. 여성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비록 공무원 시험 준비 기간까지 합치면 또래보다 사회 진출이 늦었지만,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뛰었다. 열정 하나로 뛰어든 현장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연봉은 소박했고 업무는 많았다. 처음엔 기대와 다른 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을 하면서 살면 행복하겠다던 다짐대로, 기쁜 마음으로 뛰었다. 맡은 일은 성 평등 교육 사업이었다. 성 평등 강사양성과정을 만들어 지역 곳곳에 페미니즘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었다. 교육 자료를 밤새워 준비하고, 한 명 한 명의 수강생들과 눈을 맞추며 토론을 이어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보람과 사명감이 가슴 깊이 차올랐다.


d11f46ce50603.jpg
스토킹, 교제 폭력, 디지털 성범죄 근절 캠페인


질문에서 행동으로, 함께 바꾸는 세상


질문 많던 소녀는 이제 행동으로 세상에 답하고 있다. 가족의 반대와 사회의 편견 앞에서도 움츠러들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이은주는 당당히 자신의 신념을 말한다. 물론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가부장제의 뿌리는 깊고, 변화를 향한 싸움은 더디기만 하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굳이 힘든 길을 간다”는 핀잔이 들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마음 한구석이 쓰려오지만, 그녀는 오히려 처음 사회에 눈떴던 순간을 떠올린다. 

광장에서 만나던 연대의 노래와 촛불의 온기, 그리고 책 속 문장들이 가르쳐 준 용기가 다시금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이 씨는 오늘도 현장에서 사람들의 손을 잡는다. 억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아진 내일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높인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과거의 자신과 닮은 누군가의 눈물을 발견한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이제 우리 함께 바꿔 나가 보자.” 

질문으로 시작된 작은 용기가 모여 세상을 바꿀 큰 물결이 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믿고 있다. 한때 가슴속에 질문을 품었던 소녀는 그렇게 공익활동가가 되어 오늘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인터뷰어 : 이은하
구술생애사 작가입니다. 여성학을 공부했으며,  인권활동가와 연구자로 일했습니다. 현재 50대 초반 여성의 성과 사랑,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83ed840843f7c.png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