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공익활동가주간]평범한 하루로 세상을 바꾸는 우리동네나무그늘 협동조합 단미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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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하루로 세상을 바꾸는 

우리동네나무그늘 협동조합 단미 활동가


다 같이 잘 살고 싶어하는 사람. 꼭 만나면 맛있는 음식을 건네는 큰 손과 기쁨과 슬픔을 두루 품어주는 너른 품,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튼튼한 발을 가진 사람. 지난 몇 년간 관찰해온 단미에 대한 인상은 이렇다. 한동안 단미를 만나기 힘들었다. 계엄령 선포의 밤, 국회 앞으로 나섰던 그는 “두 번 다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행동으로 옮겼고 수 개월간 광장에서 노래하고 연대하며 ‘전문시위꾼’이 되어 있었다. 좌절과 희망이 교차하는 속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함께 잘 살고 싶다는 바람은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단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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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먼저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오랫동안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어요. 2년 전쯤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진보정당의 보좌진으로 일하다가 21대 총선이 끝나고 현재는 마포에 있는 우리동네나무그늘 협동조합(이하 우리동네나무그늘)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총회를 통해 우리동네나무그늘의 이사장이 되었습니다.(웃음)


Q. 제가 단미를 인터뷰하고 싶었던 이유는, 광장 활동에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에요. 먼저 기억을 거슬러 계엄이 선포된 날로 돌아가 볼게요. 그날 밤, 국회 앞으로 나갔잖아요. 단미가 얼마 전 성미산학교 교지에 관련해서 쓴 글에 보면 “두 번 다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십 년 전 세월호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되어 있어요. 두려워하면서도 국회 앞으로 나가게 되었던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진짜로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국회로 갔어요. 사실 한 치 앞도 예측이 안 되는 상황에서 그 가운데로 진입하고 싶지 않았죠. 정말 가고 싶지 않았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면 무서운 상상을 넘어서는 두려움이 있었는데요. 같이 진보정당 보좌진으로 근무했던 친구가 ‘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을 때 <소년이 온다>의 동호가 생각나면서 처음엔 가지 말라고 만류했어요. 그러다 알고 지내던 보좌관님께 물어봤더니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하셨고요. 사실 이건 세월호 참사와는 다른 맥락이긴 했지만, 이상하게 세월호 참사가 오버랩 됐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이 상황은 국가 폭력 사태고 나라가 국민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시민은 당연히 나서야 하는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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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간디학교 재직 중, 학생들과 단미(가운데 모자 쓴 인물)


Q. 이후에도 집회가 열리는 날마다 광장에 나갔죠. 사실 왜,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열심히 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어떨 땐 정말 억울했죠.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지금 광장에 나가서 뭐 하나 하는 생각과 불만, 분노가 쌓여갔어요. 저로서는 시간을 계속해서 투여하고 있는데 인풋 대비 아웃풋이 없는 거잖아요. 그러다 헌법재판소로 탄핵 심리가 넘어가면서 광장에 나오는 사람 수가 확 줄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일상을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너무 과하게 하는 걸까? 내가 지금 광장을 지키는 이유는 뭘까? 고민이 아주 컸죠.


Q.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찾은 답이 있나요?

외면하고 싶었는데 외면을 못 했을 뿐이에요. 결국에는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건데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봤고, 어떤 면에서는 국민의 한 명으로서 그 소임을 한동안 다하지 못했고 무관심했다고 생각했어요. 2024년 5월까지가 진보정당 보좌진으로서의 제 임기였는데 진보정당이 원외 정당이 되고 나서는 아예 손을 뗀 거죠. ‘그래 잘 살아라.’ 하고 약간은 눈을 감았던 상태였죠. 그것에 대해 반성이 되기도 했고 정당에서 나라의 녹을 먹었던 사람이었던 것에 대한 책임감이 있기도 했죠. 


Q.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주 지루하고 초조하고 때로는 고양되기도 하는 몇 달이 지나갔죠.

12월 3일부터 4월 4일까지 숱한 시간을 한강진, 남태령, 광화문, 국회 앞에서 보냈어요. 광장에서 퀴어, 장애인, 여성 등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는데 언론에서는 ‘2030 여성들이 만들어낸 축제와 같은 집회’라는 이야기가 반복되었잖아요. 이 프레임이 초반엔 동의가 되지 않았어요. 또 이러다가 묻힐 거고 우리가 냈던 목소리는 이용만 되고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부와 정치인과 법관과 언론인 모두를 신뢰하지 않고 있었죠. 

계속 저는 긴장한 상태로 광장에 나갔는데 12월 24일에도 광화문 앞에서 집회가 있었거든요. 그날 처음으로 울려 퍼지는 노래들이 진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데이트도 안 가고 사람들이 응원봉, 야광봉을 들고 광화문 앞으로 수놓았어요. 옆에 있는 사람들과 간식을 나누고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내 곁에 있는 이 불빛들이 보다 나은 세상으로 견인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잠깐 했어요. 그러면서 그 생각이 조금씩 쌓여가는 시간을 보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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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공연한 간디학교 합창단


Q.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연대도 하면서 간디학교 합창단과 노래패 반디를 꾸리기도 했죠. 노래로 연대하는 건 단미에게 어떤 의미에요?

제가 일했던 제천간디학교 교가의 가사에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가 광장에서 배우는 민주주의를 잘 나누고 싶었어요. 광장의 기쁨과 분노, 슬픔이나 이 역사에 대한 기억을 체화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한 목소리로 이걸 연결할 수 있는 건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노와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래도 괜찮아’라는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전달되면 좋겠더라고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을 노랫말에 담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또 스스로 기도문을 외운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이 바뀌길 변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노래하게 되었어요. 


Q. 단상 위에 올라가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기분이 이상할 거 같아요.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3월 8일, 평등으로 가는 수요집회에 반디로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하는데 정말 민중 투사가 된 기분이었어요.(웃음) 막 흔들리는 깃발에 제가 기대고, 모인 사람들은 우리의 노래에 기대서 이 시간을 뚫고 나가려고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하게 느껴졌어요. 그날이 정말 기억에 남아요. 간디 합창단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간디학교와 연이 있는 졸업생, 재학생, 교사, 학부모들이 다 모였고 제가 전체 기획을 했다 보니까 사람들이 저한테 피드백을 많이 줬거든요. 그중 학생들이 이런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같이 산다는 건 뭐고 올바르게 깨어 있는다는 건 뭐고 민주주의라는 건 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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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공연하는 단미

Q. 단미가 민중가요를 정말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웃음) 좋아하는 노래와 가사가 있나요?

<우리의 하루>라는 노래를 가장 먼저 녹음했고 사람들과 정말 많이 불렀어요. 저에겐 가사에 담겨 있는 의미들이 마음에서 잘 안 떠나더라고요. <어른 김장하>에서 김장하 선생님도 결국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세상이고 그 사람들이 세상을 굴려서 가는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우리의 하루>에도 “평범한 우리의 하루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가사가 있어요. 평범하다는 건 기득권의 한 축이 아니라 그냥 우리와 같이 광장을 지켰던 사람들이란 거고, 결국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에서 저는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가사를 참 좋아해요. 또 최근에 <인간의 노래>를 녹음했는데요. 가사에 “끝끝내 살아내자”라는 부분이 있어요. 이번 광장 시국을 돌이켜 보면 저에겐 정말 전쟁과도 같았던 시간이었거든요. “끝끝내 살아가자”는 제가 삶 속에서, 또 광장에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이기도 해요. 계엄이 선포된 날 국회에 나갔던 이유가 제 곁에 있는 그 수많은 얼굴들을 지우지 못해서, 같이 살아보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우리가 끝내 좀 살아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Q. 4월 4일의 기억으로 돌아가서,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고 기분이 어땠어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광화문을 지나 안국으로 갔어요. 10시였던 것 같고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어요. 한 일주일 전부터 불안이 굉장히 높아지면서 탄핵 선고가 안 되면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판결문을 들으면서 우리의 엄혹했던 시간을 재판관들이 제대로 파악해줬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느껴져서 그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차오르고 그랬죠. 늦어지는 선고에 분노도 많이 일었지만(웃음) 판결문 낭독하는 영상만 10번 이상 본 거 같아요. 볼 때마다 울었어요. 


Q. 그 후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나요?

그 이후에도 연대 요청을 받은 곳에 가서 계속 노래를 하고 있어요. 여전히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과 여전히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내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이 굉장히 이질감이 들었어요. 부채감도 들고요. 탄핵 선고 이후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이 되나 싶었는데 여전히 정치는 거대 양당 싸움이고 그 안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배제되었고. 그러면 우리가 바꾼 것은 뭐가 있을까? 고민이 많이 남다 보니 계엄 이후의 일상이 이전의 일상과 같을 순 없을 거 같아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염원을 어떤 식으로 제 삶에 녹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물음이 자꾸 생겨요. 그러다가 우리동네나무그늘에 있는 구성원들과 제가 나 혼자 말고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번 정국에서 확인이 된 차에 조합 활동도 열심히 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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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Q. 최근 단미의 큰 변화라 하면 우리동네나무그늘의 이사장이 된 사건이 있죠. 전 이사장의 병환으로 새 이사장을 선출해야 했는데 단미가 큰 마음을 내줬잖아요. 어떻게 이사장이 될 결심을 했나요?

한때는 그냥 모르는 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죠.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무언가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런 공동체가 정말 흔치 않은 거예요. 또, 곁에 있는 이사진들이 정말 자기가 가진 모든 인적 자원, 물적 자원들을 내놓아가면서 조합을 꾸리는 걸 보면서 저도 더 그렇게 할 수 있게 됐고 마음 한편에 계속해서 책임과 애정이 체한 듯이 걸려 있어서 용기를 냈죠. 제가 이사장이 되면서 30대 여성 리더십으로 이 체제가 크게 전환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우리동네나무그늘이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고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어요. 그래서 약간은 움츠러드는 마음도 탄탄하게 펴질 수 있었어요. 


Q. 단미를 인터뷰하겠다고 제안하자 “내가 활동가가 맞나?” 반문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고민이었나요?

두 가지 마음이 있었죠. 첫째는 활동가를 굉장히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서 내가 걸어가는 행보가 활동가라고 불릴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있었고요. 둘째는 활동가로서 정체화하는 순간 앞으로의 삶이 너무 힘겹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활동가라는 이름에 제가 투사하는 상이 굉장히 높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조금은 거리를 두게 되는 마음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또 연대해야 하는 것들이 있으면 뛰어가야 하는 거고 함께 살기 위해서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또 손잡을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같아요. 그런 것이 활동가라고 하면 저는 활동가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잘 살아야겠죠.(웃음) 


Q. 단미가 바라보기에 단미의 활동은 어떤 영역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요? 

조금 고민이 되는데요. 우리동네나무그늘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하고 좀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조합이 굉장히 복잡하잖아요. 여성, 장애, 퀴어, 동물권, 환경, 청소년, 탈학교, 탈가정 등등 여러 주제에 조금씩 다리를 걸쳐놓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Q. 그래서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내 영역을 만들고 싶다는 고민은 없나요?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은 없어요. 스스로 무언가 규정을 하기 시작하면 내 것만 옳다는 생각에 빠질 수가 있을 것도 같고 우선순위의 배치가 계속해서 발생할 거 같아요. 같이 잘 사는 세상이 제 목표라고 하면 이게 더 중요하고 저게 덜 중요하고가 아니라 상황을 보면서 필요할 때는 여기에 함께 힘을 싣고 저기에 저게 필요하네 하면 또 힘을 더하고 이런 식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Q. 2025년도 반밖에? 반이나? 남았네요. 올해 남은 기간은 어떻게 보내고 싶어요? 

제가 필요로 하고 저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에서 새로운 밥벌이도 하고 우리동네나무그늘 조합을 둥근 조합으로 잘 서포트하면서 꾸려가는 거 그 두 가지가 저한테 제일 큰 숙제인 것 같고요. 반디라는 이름으로 노래도 열심히 하고 앨범도 내면 좋겠어요. 책도 써야 해요.(웃음) 책의 주제로는 두 가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뚱지의 하루>(가제) 같은 경우에는 한국 사회에서 살찐 여성으로서 제가 이 계급화된 신체에 얼마나 긍정하고 혹은 얼마나 부정당하며 살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이야기고요. 다른 하나는 자립과 연립에 관한 이야기인데 자립 준비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아서 그 정체성이 이 세상에 어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써보면 어떨까 싶어요. 

또, 인류애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겠어요.(웃음) 그리고 자기 돌봄을 위해 시간과 마음과 애정을 많이 쏟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마음을 열 수 있잖아요. 


인터뷰어 : 수달(양수복)
서대문구에 살고 마포구로 자주 움직이는 사람. 이야기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농사를 공부하고 있다. 우리동네나무그늘 협동조합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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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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