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력단절'이 제 경력입니다." - 한걸음랩 정윤주
“경력단절이 제 경력입니다.” 유쾌한 선언 같지만, 그 속엔 ‘나는 왜 당당할 수 없는가’에 대한 긴 질문과,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육아와 돌봄, 그리고 비가시적인 시간 속에서도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당연한 진실이 사회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정윤주 활동가는 '한걸음랩'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균열을 만들고 있다.
‘‘한걸음랩’은 경력보유여성들이 모여 스스로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고자 만든 비영리 임의단체 ‘한걸음시민랩’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콘텐츠와 웹서비스를 통해 경력공백을 가진 구직자들이 다시 일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향후 소셜임팩트 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그곳의 공동창업자 중 하나인 정윤주, 그녀가 바꾸고자 한 것은 단지 언어가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한걸음랩 정윤주 활동가
- 경력단절이 아닌 경력 보유라는 말을 쓰고 계세요. 하고 있는 활동과 관련해 ‘보유’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을까요?
2022년, 한 비영리기업의 ‘경력단절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지금 같이 활동하는 멤버들을 거기서 만나기도 했고요. 활동하면서 느꼈던 점이,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경력에 공백이 있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화가 났어요. 새벽에 회의를 해서라도 프로젝트를 마치는 책임감, 팀원들과 소통하는 과정, 그렇게 이뤄낸 일의 결과물, 모든 것이 정말 직장 다닐 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완성형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알려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던 것 같아요.
두 번째로는 ‘경력단절여성’들에게 정부 일자리 지원센터에서 하고 있는 사업의 내용을 보면, 자격증이나 기술을 배우는 일을 지원하거나, 특별한 기술없이 할 수 있는 일자리 소개가 대부분이예요. 이미 육아나 기타 사유로 공백이 생긴 여성들을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느낌이었죠. 공백 이전에 내가 했던 일과도 관계가 없고, 내가 하고싶었던 가치 있는 일도 아니었죠.
무엇보다 그 공백을 바라보는 나 스스로가 사회로 나갈 자신이 없는데, ‘언제까지 이력서를 써와라, 어느 기업에 지원해라’ 하는 식의 취업상담이 굉장히 버거웠어요. 그래서 이미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경력을 보유한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경력단절 보다는 경력 보유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시간은 단절되지 않아요. 오롯이 살았던 그 시간이 있어왔고, 저의 경우엔 여전히 진행되고 있죠.
- 기존의 경력보유여성들을 면밀히 살펴보니, 개인적으로는 취업의 의지는 있으나 그 공백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시스템적으로도 그 공백기를 문제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군요. 사회적인 인식이나 분위기도 한 몫 했겠고요.
맞아요. 취업을 위한 중간과정 없이 취업률이라는 숫자나 성과에 급급한 느낌이었어요. 저희가 실제 데이터로 확인하기도 했어요.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했던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업지원서비스 중 가장 도움이 된 것의 1위가, '도움이 된 서비스 없음'이었고 경력단절 이후 첫 일자리 구직 경로에 '친척', '친구', '동료'라고 답한 비중이 42.6% 였어요. (* 2016년 2022년 자료 참고)
지인을 통해서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이 사람의 공백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 가진 역량을 그 지인은 알고 있기 때문에 추천해주고 그 소개가 취업으로 연결된 거니까요. 어떤 자격증이나 일을 쉰 기간이 아니라 ‘어떤 능력이 있는지’에 포커싱을 두는 게 저희가 지금 하는 일인 것 같아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 힘을 찾아보자. ‘당신은 이미 모든걸 충분히 가진 사람이다’ 라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 육아든 돌봄이든 어떤 이유에서 생긴 공백이 결코 부끄럽거나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다는 말씀이네요.
맞아요. 사회가 나를 뭔가 하자 있는 사람처럼 보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어찌 보면 지금까지도 경력보유여성인 상태거든요. 임의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뿐, 월급을 받고 있거나 4대보험을 내고 있지 않으니까요.
저는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케이스인데, 육아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온전한 저의 선택이었고 그 시간에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성장했다고 느껴요. 이 육아의 경험으로 저는 육아하기 전의 저보다 더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성장을 증빙하거나 숫자로 치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시간이 별 것 아닌 시간으로 치부되는 것에 분노하게 돼요. 하하. 그래서 어디서 저를 소개해야 하는 자리가 있으면 ‘경력단절이 제 경력입니다. 당당한 경력보유 여성 정윤주입니다.’라고 말해요. 컨퍼런스나 워크샵 신청서 낼 때 소속과 직함 쓰는 란이 있잖아요. 소속이 없었을 때, 저는 거기에 제 이름 썼어요. [소속 정윤주] 나는 나에게 소속되어 있다. [직함 없음]
‘나는 나에게 소속되어 있다.’ 그 문장은 웃음처럼 가볍게 흘렀지만, 오랜 시간 자신을 의심하고 움츠렸던 나날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자리였다. 이름 하나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 단순한 행위 안에는, 틀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틀을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곧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팀원들과 함께하는 회의
-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볼 때, 문제를 인식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행동으로 옮기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윤주님은 그걸 해결하고자 움직였잖아요.
하하. 저는 해보고 싶은 건 꼭 다 해야 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대학시절에도 그랬고요. 학교 강의실에 앉아있기보다 외부에서 활동에 더 많이 참여했어요. 해외캠프 나가고 봉사단 꾸려서 봉사하고, 축제나 행사 기획하고 그랬어요. 기억에 남는 일이, 그때 역사 워크 캠프로 독일에 갔었는데, 독일사람들이 자기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반성하고 잊지 않게끔 노력하는지를 봤어요. 현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직접 소통하면서 피부로 느꼈죠.
관심사가 생기고 ‘재미있어 보인다, 궁금하다’ 싶으면 거기에 나를 내던졌던 것 같아요. 결국 ‘이건 나와 맞다 안 맞다. 나는 이걸 진짜 좋아하는구나 아니구나’를 깨닫게 하는 경험들이 된거죠.
- 어떤 경험의 결과가 부정적이면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지 않나요?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구요.
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간 했던 어떤 선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애들 키우느라 늪에 빠진 기분을 느꼈던 그 시간도 지금의 저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늪에 빠진 사람의 감정을 나는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모든 시기가 지금의 저를 만든 거예요.
그리고 제 선택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자율성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아이들에게 ‘너희를 키우느라 하고 싶은걸 하지 못 했어.’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온전히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던 나의 자율적인 선택, 그리고 아이들이 독립하기 전에 나 스스로 독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이렇게 다시 일하기를 선택한거니까요.
- 선택에 대한 온전한 책임감이 느껴져요. 선택을 망설이거나 새로운 도전 앞에서 두려울 때는 없으세요?
있죠. 그런데, 저는 결국 ‘컴포트존’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나 환경)을 깨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한걸음랩을 운영해오면서 많은 컴포트존을 깨부수며 왔다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저희가 ‘한걸음 로드북’을 출시하고 같이 활동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도전과제’쓰는 란이 있었거든요. 그때 정말 많은 분들이 ‘3년안에 자격증 따기, 기술, 능력취득하기’와 같은 말들을 쓰셨어요. 내가 어딘가에 합격하고 발탁되고 어떤 관문을 통과해야만 능력을 인정받는 구조도 저는 깨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준비가 덜 됐다,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움츠려 있지 말고, ‘두렵긴 한데, 일단 해볼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사실 매번 무서워요. 제 내면의 비판자가 있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크거든요. 하하, 근데 한번 깨부수고 나가니까 사명감 비슷한게 생겨요. 일단 깨부수고 나오니까 ‘할 수 있구나, 이게 되는거구나! 남들도 하게 해야겠다. 경력보유 여성들 다 늪에서 빼내자!’ 이런 생각이요. 그런 맥락에서 [공백러들의이야기:공백력]이라는 팟캐스트도 시작했어요. 능력 넘치는 경력보유여성들을 널리 알리고 공백기에 우리가 쌓은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게 윤주님의 ‘깨부수기’는 자기 극복에 머물지 않았다. 누구나 한 번쯤 늪에 빠졌다고 느끼는 그 시기를 함께 건너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드는 일에 닿아 있었다. 공백의 시간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하는 장치, 그 믿음을 이어가기 위한 실험들이 ‘한걸음랩’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한걸음 로드북' 홍보부스에서 동료들과 함께
- 그런 철학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조직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한걸음랩에서는 어떤 활동들을 해왔고,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우선 처음 시작은 경력보유여성들을 위한 온라인 워크샵을 기획하고 운영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육아를 하는 많은 여성들은 워크샵이 진행되는 하루 종일동안 시간을 내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하루 5분이라도 각자가 편한 시간과 장소에서 셀프 워크북을 해보도록 바꿨던게 ‘한걸음 로드북’ 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희의 첫 아이템이었어요. 펀딩도 받고 많은 분들에게 좋은 피드백도 받았죠.
요즘 준비 중인 시제품은 ‘툴킷’ 이예요. 타인이 나의 강점이나 키워드를 발견하게 돕는 도구죠. 기존의 강점 검사지들은 시험지 같잖아요. 나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데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요. 저희가 지금 테스트 중인 툴킷은 대화를 통해 강점을 찾는 도구예요. 툴킷을 하는 동안 서로 의외의 키워드를 발견해가면서 나 스스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거죠. 나아가 실물로 진행 해야하는 툴킷과는 달리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웹서비스도 기획하고 있어요.
- 한걸음랩이, 그리고 정윤주 활동가님이 활동하시면서 꼭 지켜내고자 하는 키워드가 있다면요?
저희의 핵심 키워드는 ‘전환’ 이예요. 경력보유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점,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나 노력이 밖으로 보이지 않고 숫자로 치환되지 않는다고 폄하하거나 평가절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오롯이 인정받고, 받아들이고, 존중 받는 일이 저는 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제 경력보유여성 스스로도 ‘난 이점이 너무 대단해!’라고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보는 전환점, 그리고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단한데 내가 왜 그동안 몰랐지?’하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점, 전환의 순간을 가능케 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저희의 존재 이유에요.
- 한걸음랩이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이나 지향점 있을까요?
저는 단순히 의미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데 그치고 싶지 않아요. 어떤 형태든 한걸음랩이 가진 가치를 확장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더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래서 저를 포함한 더 많은 여성들을 버티게 하는 하나의 구조가 되기를 바래요.

아산나눔재단 2024 도전 트랙 최우수상 수상의 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재야의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나대자! 나서자!’
“나대자! 나서자!” 이 말은 조용히 반복되어온 공백의 시간을 깨우는 선언이자, 스스로를 향한 주문이기도 했다.
단절이 아닌 지속의 리듬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녀는 영향력을 확장하기보다 지금의 나를 유지하고, 지켜내고, 반복해서 상기한다.
공백도 자원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그녀는 활동과 존재 사이에서 지속가능한 균형을 감각적으로 조율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정윤주는 오늘도 한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발걸음에 공명한 경력보유 여성들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한걸음씩 담담히 나아가는 중이다.
인터뷰어 : 향다
삶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이 건네는 말 한 조각, 스쳐 지나가는 표정 하나에도 따뜻한 향기를 담아 기록하고자 합니다.

2025공익활동가주간의 <활동가인터뷰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일과 삶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로 기록하는 활동을 지원합니다. 2025년에는 특별히 <광장을 만드는 활동가>를 기획인터뷰로 진행했으며, 공모를 통한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도 더불어 운영했습니다.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경력단절'이 제 경력입니다." - 한걸음랩 정윤주
“경력단절이 제 경력입니다.” 유쾌한 선언 같지만, 그 속엔 ‘나는 왜 당당할 수 없는가’에 대한 긴 질문과,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육아와 돌봄, 그리고 비가시적인 시간 속에서도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당연한 진실이 사회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정윤주 활동가는 '한걸음랩'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균열을 만들고 있다.
‘‘한걸음랩’은 경력보유여성들이 모여 스스로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고자 만든 비영리 임의단체 ‘한걸음시민랩’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콘텐츠와 웹서비스를 통해 경력공백을 가진 구직자들이 다시 일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향후 소셜임팩트 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그곳의 공동창업자 중 하나인 정윤주, 그녀가 바꾸고자 한 것은 단지 언어가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한걸음랩 정윤주 활동가
- 경력단절이 아닌 경력 보유라는 말을 쓰고 계세요. 하고 있는 활동과 관련해 ‘보유’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을까요?
2022년, 한 비영리기업의 ‘경력단절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지금 같이 활동하는 멤버들을 거기서 만나기도 했고요. 활동하면서 느꼈던 점이,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경력에 공백이 있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화가 났어요. 새벽에 회의를 해서라도 프로젝트를 마치는 책임감, 팀원들과 소통하는 과정, 그렇게 이뤄낸 일의 결과물, 모든 것이 정말 직장 다닐 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완성형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알려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던 것 같아요.
두 번째로는 ‘경력단절여성’들에게 정부 일자리 지원센터에서 하고 있는 사업의 내용을 보면, 자격증이나 기술을 배우는 일을 지원하거나, 특별한 기술없이 할 수 있는 일자리 소개가 대부분이예요. 이미 육아나 기타 사유로 공백이 생긴 여성들을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느낌이었죠. 공백 이전에 내가 했던 일과도 관계가 없고, 내가 하고싶었던 가치 있는 일도 아니었죠.
무엇보다 그 공백을 바라보는 나 스스로가 사회로 나갈 자신이 없는데, ‘언제까지 이력서를 써와라, 어느 기업에 지원해라’ 하는 식의 취업상담이 굉장히 버거웠어요. 그래서 이미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경력을 보유한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경력단절 보다는 경력 보유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시간은 단절되지 않아요. 오롯이 살았던 그 시간이 있어왔고, 저의 경우엔 여전히 진행되고 있죠.
- 기존의 경력보유여성들을 면밀히 살펴보니, 개인적으로는 취업의 의지는 있으나 그 공백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시스템적으로도 그 공백기를 문제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군요. 사회적인 인식이나 분위기도 한 몫 했겠고요.
맞아요. 취업을 위한 중간과정 없이 취업률이라는 숫자나 성과에 급급한 느낌이었어요. 저희가 실제 데이터로 확인하기도 했어요.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했던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업지원서비스 중 가장 도움이 된 것의 1위가, '도움이 된 서비스 없음'이었고 경력단절 이후 첫 일자리 구직 경로에 '친척', '친구', '동료'라고 답한 비중이 42.6% 였어요. (* 2016년 2022년 자료 참고)
지인을 통해서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이 사람의 공백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 가진 역량을 그 지인은 알고 있기 때문에 추천해주고 그 소개가 취업으로 연결된 거니까요. 어떤 자격증이나 일을 쉰 기간이 아니라 ‘어떤 능력이 있는지’에 포커싱을 두는 게 저희가 지금 하는 일인 것 같아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 힘을 찾아보자. ‘당신은 이미 모든걸 충분히 가진 사람이다’ 라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 육아든 돌봄이든 어떤 이유에서 생긴 공백이 결코 부끄럽거나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다는 말씀이네요.
맞아요. 사회가 나를 뭔가 하자 있는 사람처럼 보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어찌 보면 지금까지도 경력보유여성인 상태거든요. 임의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뿐, 월급을 받고 있거나 4대보험을 내고 있지 않으니까요.
저는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케이스인데, 육아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온전한 저의 선택이었고 그 시간에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성장했다고 느껴요. 이 육아의 경험으로 저는 육아하기 전의 저보다 더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성장을 증빙하거나 숫자로 치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시간이 별 것 아닌 시간으로 치부되는 것에 분노하게 돼요. 하하. 그래서 어디서 저를 소개해야 하는 자리가 있으면 ‘경력단절이 제 경력입니다. 당당한 경력보유 여성 정윤주입니다.’라고 말해요. 컨퍼런스나 워크샵 신청서 낼 때 소속과 직함 쓰는 란이 있잖아요. 소속이 없었을 때, 저는 거기에 제 이름 썼어요. [소속 정윤주] 나는 나에게 소속되어 있다. [직함 없음]
‘나는 나에게 소속되어 있다.’ 그 문장은 웃음처럼 가볍게 흘렀지만, 오랜 시간 자신을 의심하고 움츠렸던 나날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자리였다. 이름 하나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 단순한 행위 안에는, 틀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틀을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곧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팀원들과 함께하는 회의
-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볼 때, 문제를 인식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행동으로 옮기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윤주님은 그걸 해결하고자 움직였잖아요.
하하. 저는 해보고 싶은 건 꼭 다 해야 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대학시절에도 그랬고요. 학교 강의실에 앉아있기보다 외부에서 활동에 더 많이 참여했어요. 해외캠프 나가고 봉사단 꾸려서 봉사하고, 축제나 행사 기획하고 그랬어요. 기억에 남는 일이, 그때 역사 워크 캠프로 독일에 갔었는데, 독일사람들이 자기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반성하고 잊지 않게끔 노력하는지를 봤어요. 현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직접 소통하면서 피부로 느꼈죠.
관심사가 생기고 ‘재미있어 보인다, 궁금하다’ 싶으면 거기에 나를 내던졌던 것 같아요. 결국 ‘이건 나와 맞다 안 맞다. 나는 이걸 진짜 좋아하는구나 아니구나’를 깨닫게 하는 경험들이 된거죠.
- 어떤 경험의 결과가 부정적이면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지 않나요?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구요.
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간 했던 어떤 선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애들 키우느라 늪에 빠진 기분을 느꼈던 그 시간도 지금의 저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늪에 빠진 사람의 감정을 나는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모든 시기가 지금의 저를 만든 거예요.
그리고 제 선택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자율성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아이들에게 ‘너희를 키우느라 하고 싶은걸 하지 못 했어.’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온전히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던 나의 자율적인 선택, 그리고 아이들이 독립하기 전에 나 스스로 독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이렇게 다시 일하기를 선택한거니까요.
- 선택에 대한 온전한 책임감이 느껴져요. 선택을 망설이거나 새로운 도전 앞에서 두려울 때는 없으세요?
있죠. 그런데, 저는 결국 ‘컴포트존’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나 환경)을 깨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한걸음랩을 운영해오면서 많은 컴포트존을 깨부수며 왔다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저희가 ‘한걸음 로드북’을 출시하고 같이 활동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도전과제’쓰는 란이 있었거든요. 그때 정말 많은 분들이 ‘3년안에 자격증 따기, 기술, 능력취득하기’와 같은 말들을 쓰셨어요. 내가 어딘가에 합격하고 발탁되고 어떤 관문을 통과해야만 능력을 인정받는 구조도 저는 깨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준비가 덜 됐다,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움츠려 있지 말고, ‘두렵긴 한데, 일단 해볼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사실 매번 무서워요. 제 내면의 비판자가 있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크거든요. 하하, 근데 한번 깨부수고 나가니까 사명감 비슷한게 생겨요. 일단 깨부수고 나오니까 ‘할 수 있구나, 이게 되는거구나! 남들도 하게 해야겠다. 경력보유 여성들 다 늪에서 빼내자!’ 이런 생각이요. 그런 맥락에서 [공백러들의이야기:공백력]이라는 팟캐스트도 시작했어요. 능력 넘치는 경력보유여성들을 널리 알리고 공백기에 우리가 쌓은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게 윤주님의 ‘깨부수기’는 자기 극복에 머물지 않았다. 누구나 한 번쯤 늪에 빠졌다고 느끼는 그 시기를 함께 건너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드는 일에 닿아 있었다. 공백의 시간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하는 장치, 그 믿음을 이어가기 위한 실험들이 ‘한걸음랩’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한걸음 로드북' 홍보부스에서 동료들과 함께
- 그런 철학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조직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한걸음랩에서는 어떤 활동들을 해왔고,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우선 처음 시작은 경력보유여성들을 위한 온라인 워크샵을 기획하고 운영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육아를 하는 많은 여성들은 워크샵이 진행되는 하루 종일동안 시간을 내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하루 5분이라도 각자가 편한 시간과 장소에서 셀프 워크북을 해보도록 바꿨던게 ‘한걸음 로드북’ 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희의 첫 아이템이었어요. 펀딩도 받고 많은 분들에게 좋은 피드백도 받았죠.
요즘 준비 중인 시제품은 ‘툴킷’ 이예요. 타인이 나의 강점이나 키워드를 발견하게 돕는 도구죠. 기존의 강점 검사지들은 시험지 같잖아요. 나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데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요. 저희가 지금 테스트 중인 툴킷은 대화를 통해 강점을 찾는 도구예요. 툴킷을 하는 동안 서로 의외의 키워드를 발견해가면서 나 스스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거죠. 나아가 실물로 진행 해야하는 툴킷과는 달리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웹서비스도 기획하고 있어요.
- 한걸음랩이, 그리고 정윤주 활동가님이 활동하시면서 꼭 지켜내고자 하는 키워드가 있다면요?
저희의 핵심 키워드는 ‘전환’ 이예요. 경력보유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점,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나 노력이 밖으로 보이지 않고 숫자로 치환되지 않는다고 폄하하거나 평가절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오롯이 인정받고, 받아들이고, 존중 받는 일이 저는 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제 경력보유여성 스스로도 ‘난 이점이 너무 대단해!’라고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보는 전환점, 그리고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단한데 내가 왜 그동안 몰랐지?’하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점, 전환의 순간을 가능케 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저희의 존재 이유에요.
- 한걸음랩이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이나 지향점 있을까요?
저는 단순히 의미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데 그치고 싶지 않아요. 어떤 형태든 한걸음랩이 가진 가치를 확장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더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래서 저를 포함한 더 많은 여성들을 버티게 하는 하나의 구조가 되기를 바래요.
아산나눔재단 2024 도전 트랙 최우수상 수상의 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재야의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나대자! 나서자!’
“나대자! 나서자!” 이 말은 조용히 반복되어온 공백의 시간을 깨우는 선언이자, 스스로를 향한 주문이기도 했다.
단절이 아닌 지속의 리듬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녀는 영향력을 확장하기보다 지금의 나를 유지하고, 지켜내고, 반복해서 상기한다.
공백도 자원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그녀는 활동과 존재 사이에서 지속가능한 균형을 감각적으로 조율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정윤주는 오늘도 한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발걸음에 공명한 경력보유 여성들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한걸음씩 담담히 나아가는 중이다.